철수 : 탁자 위에 커피를 마신 다음에, 마음속에서 ‘지금 이 커피를 누가 마신 거지?’ 라는 의문이 갑자기 올라 왔습니다.
법사 : 그런데 그 생각과는 관련없이 이미 커피를 마신 거죠? 커피를 마신 다음에 그런 생각이 올라온 거잖 아요. 그러니까 내가 생각으로 커피를 마신 건 아니네요. 그렇다면 과연 탁자 위의 커피를 누가 마셨을 까요?
철수 : 제가 마셨지요, 누가 또 있겠습니까?
법사 : 그거 생각이죠. 이미 커피를 마시고 난 다음에 일어난 생각이잖아요. 그 생각이 커피를 마신 건 아니예요.
철수 : 몸이 마셨습니다.
법사 : 이것도 다 커피를 마시고 나서 생각한 거죠?.
철수 : 모르겠습니다.
법사 : 모르겠다는 것도 생각이예요. 커피를 마시고 나서 생각한 거죠? 진짜 커피를 마신 놈은 누구죠?
철수 : ????
법사 : ㅋㅋ 또 생각하세요? 이게 생각으로 답이 나와요? 진짜 커피를 마신 자를 생각으로 알 수 있냐는 거예요. 뭐라고 답 을 하든 다 커피를 마신 후에 하는 생각이잖아요. 그런데 커피를 마신 것은 생각이전의 일이예요. 이와 같이 생각 이 전의 일을 생각으로 알 수 있어요?
철수 : 알 수 없습니다.
법사 : 알 수 없죠? 바로 그거예요. 분별로 알 수 없는 놈이 바로 이놈인데, 이것은 절대 생각으로 찾을 수가 없어요.
구도자가 애타게 찾는 그놈이 곧 성품인데, 이놈은 절대 생각으로 알 수가 없다고요. 그래서 단지불회 시즉견성(但知不會 是卽見性)이라는 말이 있어요. “단지 알지 못할 줄 알면, 그것이 성품을 본 것, 즉 견성이다.” 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견성을 하면, 누가 커피를 마셨는지 결코 생각으로 알 수가 없다는 걸 알아요. 이것은 분별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커피를 마신 것이 아니었어. 그럼 진짜 누가 커피를 마셨느냐고요?
(손가락으로 눈앞을 가리키면서) 바로 이것이야. 이거. 여기서 이것을 알아채면, 마음의 눈을 뜬 것이고, 아직 모르겠으면, 마음에 장벽이 가로막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 커피를 마셨느냐? 라는 질문도 늦었어요. 이미 커피를 마시고 난 후에 생각을 일으킨 것이니까...
그러나 마음의 눈을 뜬 사람은 "누가 커피를 마셨느냐?" 라는 질문에 커피를 마신 그놈이 같이 있다는 것을 알아요. 왜냐하면 "누가 커피를 마셨느냐?" 라는 질문을 통해서 커피를 마신 그놈이 동시에 드러나고 있으니까요.
커피를 마신 그것이 나의 성품이고, 나의 존재함이고 나의 살아있음(생명)이거든요. "누가 커피를 마셨느냐?" 라는 질문으로 나의 성품이, 나의 존재함이, 나의 살아있음이 드러나고 있잖아요. 이것이 없다면,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어요?
이와 같이 “탁자 위의 커피를 누가 마신 거지?” 라는 질문을 통해서 커피를 마신 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누가 마신 거지?” 그 질문을 통해서 이놈(생명 : 실제 물 마신 놈)이 드러나고 있잖아요? 이놈(생명)이 있으니까 그런 질문을 한 거잖아요.
그래서 질문 속에 답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누가 마신 거지?” 이 말속에 깨달음, 생명이 들어있어요. 나의 존재함이, 나의 생명이 이 말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거죠.
이 질문을 벗어나서 어디에 따로 깨달음이 있고, 나의 생명이 따로 있겠어요? 이 질문 자체가 곧장 나의 깨달음을, 나의 존재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지요.
“누가 커피를 마신 거지?” 이 질문 자체가 그대로 답인 거죠.
그래서 소를 타고서 소를 찾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