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字 공안으로 유명한 조주선사의 깨달은 이야기입니다.
조주의 평상심시도
조주가 스승 남전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도(道)입니까?”
남전 : 평상심이 도(道)다.
조주 : 어떻게 해야 도에 이릅니까?
남전 : 어떻게 하려고 하면, 어긋난다.
조주 : 닦아 향하지 않는다면, 우리 일상이 도인지 어떻게 압니까?
남전 : 도는 알고 모르고와 아무 상관이 없다. 아는 것은 망령된 깨달음이며, 모르는 것은 깜깜하게 어두운 것이다.
만약 참으로 분별할 수 없는 도에 통달한다면, 마치 허공과 같이 텅비고 탁 트일 것이니, 어찌 억지로 시비를 할 수
있겠는가?
조주가 남전선사의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과연 조주가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조주스님이 스승 남전선사에게 묻습니다. “무엇이 도(道)입니까?”
그러자 남전선사가 “평상심이 도(道)”라고 답합니다.
평상심이 무엇입니까? 한자말이라 어려운데 쉽게 말하면, 우리의 견문각지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상생활이 그대로 도(道)라는 말입니다.
일반인들이 생각하기로는 선방에서 스님들이 용맹정진 수행하는데 도(道)가 있을 것 같은데, 그냥 배고프면 밥먹고 똥마려우면 똥싸고 졸리면 잠자는 것이 도라는 말입니다.
어째서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잠자는 평상심이 도일까요?
배고플 때 배고픈 줄 아는 놈이 누구죠? 졸릴 때 졸리는 줄 아는 놈이 누구죠? 몸뚱이 내가 알까요? 이 몸뚱이는 지각하는 자체의 성품이 없어요. 부처가 배고픈 줄 알고, 졸리는 줄 아는 겁니다.
지금까지 일상생활을 내가 하는 줄 알았더니, 깨닫고 보니 부처가 다 하는 거였어. ㅎㅎㅎ 그러니까 견문각지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상생활이 그대로 도(道) 아니겠어요?
조주가 바로 물어요. “어떻게 해야 도(道)에 이릅니까?”
그러니까 남전선사가 “어떻게 하려고 하면, 그르친다.”고 답합니다.
도(道) 닦는 수행인들은 선사들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깨닫습니까?”
온통 관심이 깨닫는 방법에 가있습니다. 그래서 화두를 든다 위빠사나 관법을 한다 염불을 한다 삼천배를 한다 등등 온갖 수행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남전선사는 말합니다. “어떻게 하려고 하면, 그르친다.” 이 말은 수행을 하면 그르친다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수행을 한다는 것은 지금 내가 부처가 아니라 중생이라고 보는 관점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불완전한 중생이니까 갈고 닦아서 부처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조사선에서는 뒤집어진 착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사선에서는 내가 중생이라는 착각을 벗어나서 부처로 바로 보는 깨달음을 강조하지 수행을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육조 혜능스님도 육조단경에서 “오직 견성만을 말할 뿐 선정과 해탈은 논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일체 만법은 우리의 분별이 만들어낸 실체가 없는 이름이나 이미지일 뿐입니다. 즉 나도 너도 세상도 실체가 없는 시공간적인 이름일 뿐이어서, 우리 일상에서 행위의 주체도 없고 행위의 객체도 없는 게 있는 그대로 진실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따로 있다는 것은 망상이었을 뿐, 본래 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래 없는 내가 유위적인 수행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이분법인 것이고, 오히려 수행에 집착하면 할수록 수행하는 아상만 강화되는 것입니다.
또 조주가 묻습니다. “도(道)를 향해 나아가는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 일상이 도(道)인지 어떻게 압니까?”
당연한 의문 아니겠습니까?
남전선사는 말합니다. “도(道)는 알고 모르고와 아무 상관이 없다.”
도를 알았다느니 또는 도를 모르겠다느니 하는 것은 다 분별망상입니다.
도라는 것은 분별이 안되는 자리를 가리키는 것이니, 그런 분별망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도를 깨닫든 못깨닫든 견문각지 어묵동정 행주좌와 우리 일상이 그대로 도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순간순간 부처로서 살아갑니다. 낮에도 밤에도 꿈속에서도 부처와 함께 살고, 부처와 함께
잠들고, 부처와 함께 일어나고, 부처와 함께 꿈에 듭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중생은 부처는 잊어버리고 내가 주체로서 살아간다고, 내가 수행한다고 망상할 뿐입니다.
근데 희유한 일은 이와 같이 내가 살아간다고, 내가 수행한다고 망상하는 일조차 부처가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보고 듣고 말하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일을 다 부처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부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법화경에서 일불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짜 희유한 일은 내가 없음에도 보고 듣고 말하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일이 저절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구의 일이겠습니까?
다만 이것이 오직 부처의 일임을 깨닫는 것만이 요긴하다 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부처라고 하는 것도 방편의 말일 뿐, 본래 이것은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습니다.
과연 이것이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