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임제할로 유명한 중국 당나라 때 선승인 임제선사의 깨침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한국 불교 조계종의 선(禪) 사상은 임제선사의 법맥을 이은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선불교를 이끌어온 선사들이 대부분 임제선사의 법손이기 때문이죠.
임제스님은 출가(出家)하여 경율(經律)을 익힌 후에 황벽(黃檗)선사 회상(會上)을 찾아가서, 3년 동안 산문(山門)을 나가지 않고 참선정진에 전력(全力)을 다 쏟았으나 깨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당시 입승을 보던 목주스님의 도움으로 황벽선사께 찾아가 세 번이나 불법의 적적대의(긴요한 뜻)를 물었으나, 황벽선사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장자(拄杖子)로 삽십방(棒)을 때리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말 한마디 일러주지 않았습니다.
임제스님이 삐져가지고 다른 데로 가겠다고 하자, 황벽선사는 대우선사를 찾아가라고 소개해주었고, 임제는 대우선사를 찾아가 투덜거렸습니다.
"제가 황벽스님에게 불법(佛法)의 가장 긴요한 뜻이 무엇인가를 세 번이나 여쭈었다가, 세 번 다 몽둥이만 흠씬 맞았습니다. 대체 저에게 무슨 허물이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대우 선사께서 무릎을 치시면서,
"황벽 선사께서 그대를 위해 혼신(渾身)의 힘을 다해 가르치셨는데, 그대는 여기 와서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가?" 하시며 '허허' 웃으셨다.
순간, 웃는 그 소리에 임제 스님은 홀연히 진리의 눈을 떴다. 그토록 의심하던 '황벽 삽십방(棒)'의 낙처(落處)를 알았던 것입니다. "황벽의 불법(佛法)이 별것 아니구나!"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임제 스님이 불쑥 이렇게 말하자, 대우 선사께서 임제 스님의 멱살을 잡고는 다그치셨습니다.
"이 철없는 오줌싸개야! 네가 무슨 도리를 알았기에, 조금 전에는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더니, 이제 와서는 황벽의 불법(佛法)이 별것 아니라고 하느냐?"
그러자 임제 스님이 대우 선사의 옆구리를 세 번 쥐어박으니, 대우 선사께서 잡았던 멱살을 놓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대의 스승은 황벽이니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네." 하고 임제스님을 황벽선사에게로 돌아가도록 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임제스님이 깨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황벽선사는 진리가 뭐냐고 묻는 제자를 왜 말없이 때리기만 했을까요?
우리는 진리라고 하면, 지금 여기를 떠난 특별한 것으로 그려서 생각으로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고, 생각으로 찾아서 찾아지는 객관적 대상이 결코 아닙니다.
깨닫기 전 임제는 진리가 따로 있어서, 내가 그 진리를 찾아야 하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진리가 객관적으로 먼저 있고, 그리고 ‘저게 진리로구나.’ 하는 내 분별은 나중이 됩니다. 이런 이원적 관점에서 보면, 진리라는 것이 주인이 되고, 그리고 나는 그것을 진리라고 부르고 찾을 수밖에 없으니까 종이 됩니다.
모든 중생들이 이런 뒤집혀진 분별의 관점에서 살고 있어요. 진리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 삼라만상이 먼저 존재하고, 나는 이 객관적인 세계 속에 태어나서 일정 기간 살다가 죽는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습니다.
이런 이원적 분별심의 구조에서 진리를 찾고 있으니, 결코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황벽스님은 몽둥이로 때려서 곧바로 진리를 가리켜 보인 것입니다. 실상의 안목에서 보면, 진리를 묻는 그놈이 바로 진리요, 몽둥이를 들어 때리는 놈도 진리요, 맞은 놈도 진리요, 또 아픈 놈도 내가 아니라 바로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임제는 이것을 돌아볼 안목이 전혀 없었어요. 오직 대상 경계에 끌려가서, ‘진리는 물었는데, 왜 때리는 거지?’ ‘내가 뭘 잘못 했지?’ ‘내가 왜 맞은 거지?’ 하는 의문에만 빠져있었던 것이죠.
그러다가 대우선사를 찾아가서 진리를 몰라서 진리가 뭐냐고 물은 내가 무슨 잘못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대다가 대우선사가 "황벽 선사께서 그대를 위해 혼신(渾身)의 힘을 다해 가리키셨는데, 그대는 여기 와서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가?" 하시며 '허허' 웃으시는 소리에 임제 스님은 홀연히 진리의 눈을 떠서 이것을 돌아봤던 것입니다.
깨닫기 전에 임제는 내가 황벽선사한테 분명히 맞았고 내가 아프다고 계속 생각했는데, 마음의 눈을 떠서 생각을 멈추고 돌아보는 순간, '뭐야 이거?' 생각을 일으키면, 맞은 나도 있고 내가 아팠던 기억도 있지만,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맞은 나도 없고 내가 아팠던 기억도 본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생각이나 느낌은 오고 가지만, 그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이 늘 존재하는 텅빈 이 바탕 자리를 알아차린 겁니다. 즉 꿈을 깬 것입니다.
지금까지 진리라는 것도 진리가 따로 있어서 내가 진리를 보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여기서 내가 먼저 진리라는 분별을 내니까 진리가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중생들의 관점과 다르게 주객이 완전히 뒤집혀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면, 여기서 분별하고 있는 내가 만물의 주인이라는 걸 깨달은 거예요. 육체를 가진 나를 포함한 세상 만물이란 내가 먼저 보고 분별한 이름이요 이미지일 뿐이고, 객관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 만물이란 내가 분별로 창조해낸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고, 이것을 일체유심조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60억 인구가 각자가 분별로 만든 서로 다른 가상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꿈속 세상과 똑같아요. 꿈속 세상이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각자가 분별로 일시적으로 만든 세상일 뿐이니까요.
그렇다면 임제가 깨달은 실상의 세계는 어떠한 세상일까요? 결국 만법은 내가 보고 분별한 이름이요 이미지일 뿐 실체가 아니니까 지금 여기 나에게로 귀결됩니다. 만법귀일이지요. 그럼 만법귀일 되는 하나인, 지금 여기의 참나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것은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생각으로 이해할 수도 없어요. 물을 마심에 물이 찬지 뜨거운지 아는 것처럼 오직 자기 스스로 깨달을 뿐입니다. 오직 이것(참나)만이 영원한 생명이요, 만물을 내보내고 거둬드리는 대기대용의 기틀(엔진)입니다.
옛 스승들은 이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뜰앞에 잣나무다” “마삼근이다” “똥 막대기다” 라고 말하거나 또는 고함을 지르거나 방망이로 때려서 이 영원한 생명의 자리를 직접 가리켜 보였습니다.
‘진리를 물었는데, 왜 뜰앞의 잣나무라고 하는 거지?’ 하고 경계를 따라가서 분별하면 그르쳐버리지만, 경계를 따라가지 않으면 “뜰앞의 잣나무”가 그대로 영원한 생명의 자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진리를 물었는데, 왜 때리는 거지?’ 하고 경계를 따라가서 분별하면 그르쳐버리지만, 경계를 따라가지 않으면 매맞은 아픔이 그대로 영원한 생명의 자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먼 산에 연기가 나면, 거기에 불이 있는 것을 아는 것과 같고, 창밖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면, 거기에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임제가 황벽선사에게 30방을 맞고 깨달은 소식이 무엇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