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제7칙 평창(評唱)에 '병정동자래구화(丙丁童子來求火)’의 선화(禪話)가 나온다.
법안(法眼)선사의 문하에는 현칙(玄則)이라는 제자가 있었다.
현칙은 이미 깨달음을 얻었다고 스스로 자처하며, 예불도, 참선도,, 또한 스승에게 법문도 청하지 않았다.
어느 날 법안선사가 현칙에게 물었다.
법안 : 자네가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되었는가?
현칙 : 3년쯤 되어갑니다.
법안 : 그런데 그동안 어째서 입실하여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인가?
현칙 : 제가 이곳에 오기 전에 청림선사를 모셨는데,, 그때 이미 깨달음을 얻어 일체 의문이 사라 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법안 : 청림선사에게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 들려줄 수 있겠는가?
현칙 : 제가 선사께 '무엇이 부처입니까?' 라고 묻자, 선사께서 제게 '병정동자래구화(丙丁童子來 求火)'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간 저는 바로 깨달았습니다.
법안 : 그러한가,, 그렇다면 자네는 그 뜻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나에게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현칙 : 병정동자란 불을 가진 동자라는 뜻입니다. 불을 가진 자가 또 불을 구하러 왔다고 했으니,, 부처가 또 부처를 구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미 부처인데, 또 부처를 구해 무엇하느냐란 말씀 으로,,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모든 의문이 사라졌습니다.
법안 : 현칙아, 과연 잘못 알았구나. 그대가 알고 있는 것은 바른 깨달음이 아니다.
이 말을 들은 현칙은 스승의 말을 수긍할 수 없다며, 얼굴을 붉히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이에 법안스님께서 “ 이 사람이 만일 다시 돌아온다면 구제할 수 있지만, 오지 않는다면 구제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현칙은 몇일을 가던 도중에 스스로 곰곰이 헤아려 보니, ‘스승이 그래도 많은 대중과 제자를 거느린 큰 선지식이신데,, 무슨 깊은 뜻이 있어 자신에게 그랬지 않았을까?’ 란 생각이 들어 마침내 되돌아와 다시 법안스님을 찾아갔다.
법안 : 자네가 다시 어쩐 일인가?
현칙 : 스님께 다시 여쭙고 싶습니다.
법안 : 그래? 말해보거라. 내 너를 위해 답해주겠다.
현칙 : 무엇이 부처입니까?
법안 : “병정동자래구화(丙丁童子來求火)”
불을 가진 놈이 또 불을 구하러 왔구나!
이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현칙은 크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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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칙스님은 첫 번째 깨달을 때도 청림선사로부터 “벙정동자래구화(丙丁童子來求火)”라는 말을
들었고, 두 번째 깨달을 때도 법안선사로부터 “병정동자래구화(丙丁童子來求火)”라는 똑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두 깨달음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첫 번째 깨달았을 때는 ‘아, 내가 이미 부처로구나’ 라고 머리로 이해한 수준의 해오(解悟)라고 보아야 합니다.
왜냐면, 법안선사가 “자네는 그 뜻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나에게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라고 요구하였을 때, 현칙은
선사의 말에 떨어져셔 주저리주저리 설명하고 있거든요.
그때 현칙이 진짜 깨달았다면, 선사의 저런 요구를 받았을 때 곧장 이 자리를 드러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칙은 진짜 깨닫지 못하고 머리로 이해한 해오의 수준이었기 때문에 법안선사의 “현칙아, 과연 잘못 알았구나.
그대가 알고 있는 것은 바른 깨달음이 아니다.” 라는 말에 꼼짝없이 떨어져버린 것입니다.
겨우 머리로 해오한 공부인이 천오백 대중을 거느리는 큰 사찰의 권위 있는 대선사가 “그거 바른 깨달음이 아니다.” 라고 부정하는 말에 나가떨어지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때 현칙의 심정은 다 깨달았다고 기고만장하다가 천길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은산철벽에 갇혀서 꽉 막혀버린 것(金剛圈)과 같고, 밤송이를 삼킨 것(栗棘蓬)과 같이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칙은 용케도 한 생각 돌이켜 다시 법안선사를 찾을 커다란 용기가 있었습니다.
대선사라고 하는 권위자가 자기 공부를 부정하는 이런 역경계에 부딪쳤을 때 정견력(正見力)과 법력(法力)을 가진 공부인만이 그 역경계를 뚫고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칙은 법안선사의 “병정동자래구화(丙丁童子來求火)”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비로소 크게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현칙의 두 번째 깨달음은 선사의 말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부처다.’ 라고 하는 미세한 생각까지 뚝
끊어지고 그냥 이 자리와 하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선화(禪話)를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공부인이 권위를 가진 스승이 자기의 공부를 부정하는 역경계와 같이 우리 일상의 삶에서도 수많은 역경게를 부딪칠 때
어떻게 돌파해 나갈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대선사가 자기 공부를 부정하는 상황을 맞이한 현칙의 경우 스승을 무시하거나 회피했으면 크게 깨닫는 기연을 만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치열한 현실의 삶을 사는 우리도 직장에서 또는 가정에서 여러 가지 역경계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직장 상사와 의견이 맞지 않아 큰 충돌을 벌인다든지 갑자기 큰 질병에 걸려 생사(生死)가 오락가락한다든지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나서 전 재산이 날라가게 생겼다든지 등등 크고 작은 많은 역경계를 만납니다.
이러한 역경계를 맞았을 때 과연 평정심을 잃지 않고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법력과 지혜를 발휘할 것인가 아니면, 경계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건강을 잃고 쓰러져버릴 것인가..
우리가 마음공부를 한다는 것은 이러한 역경계를 만났을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죽는 순간에 써먹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경계에서 써먹기 위해서는 모든 경계가 꿈과 같고 환영과 같다는 정도의 이해력을 가지고는 어림도 없어요.
생각이전의 이 자리를 진짜 깨닫고 이 자리와 하나가 되어서 역경계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정견력(正見力)을 갖추는 것이 법력(法力)이고, 이러한 법력의 차이에 따라 천차만별의 경지가 나뉩니다.
법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나를 억압하는 역경계를 끝까지 흔들림없이 정견하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억압하는 두려운 존재(직장상사, 스승, 시어머니 등등)를 넘어서는 내적인 힘(內功)을 길러야 합니다.
알고 보면, 그런 존재가 마음밖에 실재하는 게 아니고, 내 마음이 인연따라 그려놓은 환영이었다는 걸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런 두려운 존재가 내 마음이 그려놓은 환영에 불과하더라도 그 환영에 빠지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해서 나를 억압하고
휘둘리게 할 것이지만, 진짜 환영이라는 걸 확철하게 깨닫고 보면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문제는 대부분 사람들이 자기 생각에 빠져 있어서 그것이 환영인 줄 깨닫지 못하고 큰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 공부인은 생각이전의 이 자리를 깨닫고 이 자리와 하나가 되어서 각종 역경계를 정견할 수 있는 법력을 길러나가는 공부가 시급하다고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