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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최고 신통 : “누진통”

by chulwoo5607 2025. 2. 5.

하루는 외도인 오통선인이 부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육신통 중에 부처님의 최고 신통이라는 누진통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오통선인이여!” 하고 불렀어요.

오통선인이 “예!” 하고 대답하자,

부처님께서 “바로 그것이다.” 그랬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번뇌에서 즉각 벗어나는 신통, 즉 누진통이라는 것이 뭐예요?

지금 저절로 보이고 저절로 들리고, 누가 부르면, 저절로 대답하는 그것이라는 겁니다.

 

아니, 누가 부르면 대답하는 이게 무슨 신통이라는 거죠?

이것으로 어떻게 번뇌에서 즉각 벗어난다는 거죠?

물론 그걸 내가 한다고 생각한다면, 무슨 신통이라고 할 게 전혀 없는 거죠.

그러나 보고 듣고 누가 부르면 대답하는 이것을 내가 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면, 이것만한 불가사의한 신통도 없는 거죠.

보고 듣고 누가 부르면 대답하는 게 내가 아니라면, 누가 하는 거죠? ㅎㅎㅎ

 

오늘 아침에 잠에서 깰 때 자기가 의도해서 몇시 몇분 몇초에 깨야지 해서 깼나요?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깨진 거 아닌가요?

 

또 눈을 떠서 세상을 보려고 의도해서 봤나요? 눈을 뜨면, 내 의도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저절로 세상이 펼쳐져 있지 않나요?

 

그러니까 내가 이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내 의도대로 보는 것이라면, 안 볼 수도 있어야지.

지금 눈앞에 세상이 보이는 것을 멈출 수 있나요? 눈을 감으면 안보이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눈을 감으면, 깜깜한 게 보이잖아요. 이 보는 작용을 내 의지로 멈출 수 있어요? 없어요.

 

우리는 꿈속에서도 봐요. 더 나아가 꿈도 없는 깊은 잠속에서도 우리가 의식하진 못하지만, 보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침에 깨서 어젯밤에 꿈도 없이 아주 깊게 잘 잤다고 알잖아요.

 

듣는 작용도 마찬가지로 내가 듣는 게 아닙니다. 만약에 내가 듣는 것이라면, 아파트 층간소음 문제는 일어나지도 않을 거예요. 듣기 싫은 소리는 안들으면 되잖아요. 내가 듣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소리를 듣는 작용에 관여할 수가 없는 거예요.

 

누가 부르면 대답하는 것도 마찬가지잖아요. 누가 갑자기 부르면, 의도적으로 대답을 하나요? 아니잖아요.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대답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대답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또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내가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만약에 내가 주도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라면, 왜 번뇌망상에 시달리고 괴로워하죠? 그냥 안하면 되잖아요.

 

왜 우리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트라우마나 생각들을 떠올려서 괴롭힘을 당할꺄요?

내가 생각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생각이 떠오르는 작용에 관여할 수가 없어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신기하고 신통하고 불가사의하잖아요. 내가 하는 게 아니라면, 누가 보고 누가 듣고 누가 대답하고 누가 생각하는 거냐고요?

 

이런 불가사의한 신통을 부처님만 하신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지금 그런 신통을 쓰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 부처님과 동일한 신통을 쓰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그것이 불가사의한 신통인 줄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거죠.

 

왜냐? 우리는 대부분이 내가 있어서 내가 보고, 내가 듣고, 내가 대답하고, 내가 생각한다고 믿어버리기 때문에 그게 전혀 불가사의한 신통으로 안보이는 거예요.

 

그러나 불교에서 소위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것을 깨달은 거예요. 지금까지 내가 보고 내가 듣고 내가 대답하고 내가 생각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구나.

 

이걸 깨닫게 되면, 즉각 번뇌에서 벗어납니다. 깨닫기 전에는 번뇌망상을 내가 하는 줄 알았기 때문에 번뇌망상이 올라오면, 명상을 한다느니 관법을 한다느니 무슨 심리요법을 한다느니 번뇌망상을 없애려고 발버둥을 쳤어요.

 

그러나 깨닫고 나면, 내가 번뇌망상을 일으킨 게 아닌데, 번뇌망상을 없애는 것도 내가 할 게 없어요.

그냥 내버려두는 것밖에는.. 저절로 일어났으니까 사라지는 것도 저절로 사라질 때까지..

 

이 공부는 내가 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는 공부입니다. 그래서 깨닫게 되면 내가 사라진다고..

지금까지 내가 있다고 굳게 믿었던 자아가 죽는 공부죠.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이것을 내가 하는 게 아니라는 게 100% 확철해질 때, 비로소 내가 할 게 없어져 버려요.

"아하, 애초부터 나라는 게 망상이었구나. 내가 할 수 있는 게 진짜 하나도 없구나.."

 

그때부터 진짜 방하착하게 되는 거죠. 억지로 무슨 노력해서 쉬는 게 아니라, 저절로 쉬게 되는 거죠.

경계 따라가서 조작하는 것을 멈추는 거야. 그래서 멈추면 보인다는 말도 나온 겁니다.

 

여기, 전체성의 자리. 이 자리는 뭐라고 규정할 수가 없어요. 본래 이름도 없어. 뭐라고 입 벌리는 순간, 그르치는 거야.

망상에 떨어지는 거야. 여기는 본래부터 한물건도 없어요. 텅 비었어. 오온이 쌓일 그릇, 아상이 존재할 수가 없다고요.

 

내가 하는 게 하나도 없다니까 어떤 사람은 허무하다고 그래.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허무하다는 생각을 내가 했나? 아니잖아. 인연과 조건에 따라 그냥 저절로 그런 생각이 올라온 거지.

그렇다면, 내가 그 생각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누가 허무해질 껀데?

 

좌우간 내가 없는데도 저절로 삶은 펼쳐지고, 저절로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고 알아집니다.

그리고 희로애락도 인연과 조건에 따라 저절로 펼쳐지는데, 희로애락을 누가 경험하는 거지요?

 

이게 신통이고, 기적이고, 불가사의한 거죠. 이런 눈으로 삶을 바라보게 돼요.

 

그럼 삶이 하루 하루가 신비하고 새롭게 됩니다.

맑으면 맑은 대로 좋고, 흐리면 흐린 대로 좋고,

 

하루 하루가 좋은 날입니다.

(日日是好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