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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by chulwoo5607 2025. 2. 4.

大通神秀(대통신수)의 게송

 

身是菩提樹 (신시보리수) 몸은 보리라는 나무요

心如明鏡臺 (심여명경대) 마음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라

時時勤拂拭 (시시근불식) 언제나 부지런히 갈고 닦아

莫使惹塵埃 (막사야진애) 티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

 

六祖慧能(육조혜능)의 게송

 

菩提本無樹 (보리본무수)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明鏡亦非臺 (명경역비대)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本來無一物 (본래무일물) 본래 한 물건도 없으니

何處惹塵埃 (하처야진애)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있으리오.

 

위 두 게송은 육조단경에 나오는 게송이다.

전자인 신수의 게송은 오조 홍인으로부터 인가를 받지 못했고, 후자인 혜능의 게송은 오조 홍인로부터 인가를 받아 육조가 되었다.

 

두 게송에는 근본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

 

전자는 몸과 마음이 따로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전형적인 이분법(二分法)의 세계관이다. 반면에 후자는 본래무일물로 보는 불이법(不二法)의 세계관이다.

 

전자는 몸과 마음을 비롯하여 육안으로 보이는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중생들의 세계관과 일치한다.

 

그러나 후자는 몸과 마음을 비롯하여 육안으로 보이는 세계가 객관적으로 실제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분별에 의해서 지어진 이름과 이미지의 세계라고 본다. 즉 일체 유위법을 여몽환포영이라고 보는 금강경의 세계관과 일치한다.

 

나를 비롯한 눈에 보이는 세계가 실제한다고 보면, 우리는 바로 비교 갈등의 삶을 살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중생세계는 투쟁을 피할 수 없어 고해(苦海)요 사바세계가 된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고해(苦海)인 사바세계를 벗어나 열반의 세계로 해탈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수행을 강조한다.

 

전자의 게송에서도 부지런히 갈고 닦아 티끌이 일지 않도록 수행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본래무일물로 보는 불이법의 입장에서는 수행보다는 이분법으로 보고 있는 착각을 바로잡는 깨달음을 강조하게 된다.

육조 혜능도 오직 견성, 즉 깨달음만을 말할 뿐, 선정과 해탈은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중생들이 고해(苦海)를 건너는 길은 오직 일체 만물이 실체가 없는 이름과 이미지일 뿐임을 깨닫는다면, 있는 그대로의 실재인 여래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될 것이다.

 

금강경에서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라고 하고 있다. 즉 모든 상(相)이 상(相)이 아님을 본다면, 곧장 여래를 보게 될 것이라고 하고 있다.

 

혜능은 몸과 마음을 비롯한 육안으로 보이는 모든 세계가 있는 그대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때가 낀다는 것은 우리의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 것이다.

 

나를 비롯한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있는 그대로 한물건도 없다고 보는 저 혜능의 말을 과연 집어삼킬 수 있겠는가?

 

이것이 마음공부의 관건이다.

오조 홍인 문하에 가장 뛰어난 수제자였던 신수스님조차도 이 관문을 넘지 못하였는데, 공양간에서 방아를 찧던 혜능 행자가 이 관문을 통과하였던 것이다.

 

분별의 세계에서 없다는 것은 있는 것을 없애야 하는 것인데, 법의 세계에서 없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해로는 전혀 알 수 없고, 오직 분별을 벗어난 체험, 즉 깨달아야만 알 수 있다. 즉 불이법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떠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지금 보고 듣는 이것은 과연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