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조선사와 시자였던 백장스님이 강가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들오리들이 “끼룩 끼룩” 울면서 날아갔습니다.
마조 : 저것이 무엇이냐?
백장 : 들오리입니다.
마조 : 어디로 갔느냐?
백장 : 멀리 저쪽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러자 마조선사는 느닷없이 백장의 코를 세게 잡아 비틀었습니다.
갑작스레 당한 백장은 아파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얏~”
그때 마조선사가 호통을 치며 말했습니다. “야, 이놈아. 멀리 날아갔다더니
여기 있지 않느냐!“
스승의 호통에 백장스님이 크게 깨달았습니다.
과연 백장스님은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이 공안의 첫 번째 질문을 살펴봅시다.
“저것이 무엇이냐?”는 마조의 질문에 백장이 “들오리”라고 한 것은 분별심으로 대답한 것입니다.
마조가 들오리를 몰라서 물었겠습니까? 백장은 아직 깨닫기 전이라 대상경계가 객관적으로 실제한다고 믿는 분별의 세계에 빠져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들오리가 실제로 저기 있기 때문에 내가 들오리라고 부른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분별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 중생의 견해입니다.
그러나 둘이 아닌 중도실상의 관점에서 보면, 과연 들오리가 실제로 존재할까요? 아닙니다. 들오리라는 것은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기 위해서 임시로 붙여놓은 이름이요 이미지일 뿐입니다. 이름이나 이미지가 진짜는 아니잖아요. 그러면, 진짜는 무엇일까요?
“저것이 무엇이냐?”는 마조의 질문에 백장은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했을까요?
두 번째 질문을 봅시다.
마조선사가 재차 묻습니다. “어디로 갔느냐?” 이 질문에 여전히 대상경계의 관점에 빠져있는 백장은 “저쪽으로 날아갔습니다.”라고 분별로 대답합니다.
그러나 분별할 수 없는 실상의 관점에서 보면, 이름이요 이미지일 뿐인 들오리가 실제로 저쪽으로 날아갈 수 있을까요?
진실은 들오리가 저쪽으로 날아가는 일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내가 일으킨 분별(“오리가 저쪽으로 날아갔다.”)일 뿐입니다. 이 분별로 인해 들오리가 날아간 듯 보일 뿐입니다.
영화에서나 꿈속에서 들오리가 저쪽으로 날아갔더라도 실제 날아간 게 아니잖아요. 마치 그와 같아요. 현실이나 꿈이나 똑같은 구조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일체유위법이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마조선사가 백장의 코를 비틀고 호통을 치잖아요. “야, 이놈아. 멀리 날아갔다더니 여기 있지 않느냐!“ 이 본성은 본래 형상이 없어서 오고 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항상 지금 여기 존재할 뿐이죠. 이것을 서양에서는 현존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갔느냐?”는 마조의 질문에 백장은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했을까요?
마지막으로 세 번째 장면을 보겠습니다.
분별경계에 잠들어 있는 백장을 깨우기 위해 마조선사는 백장의 코를 잡아 비틀고 있습니다.
마조선사가 백장의 코를 세게 비튼 것, 백장이 아프다고 소리(“아얏~”)를 지른 것, 그리고 그 통증, “여기 있지 않느냐”고 마조가 고함친 것이 전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데, 그것을 아시겠습니까?
각각의 경계에서 모두 지금 여기, 이 영원한 생명자리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백장스님은 이 영원한 생명자리가 늘 지금여기에서 생생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을 깨친 것입니다.
‘아, 이게 생생하게 살아있구나!’
근데 이 영원한 생명자리가 과연 무엇입니까?
이것은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생각으로 이해할 수도 없어요. 그러나 백장처럼 코를 잡혀 세게 비틀림을 당하면, “아얏~” 비명을 지르며 통증을 느끼겠지요. 이 통증과 동시에 곧장 이것이 드러났습니다.
이때 백장은 “아하~ 이것!” 하고 깨어났던 것입니다.
이 통증을 느끼는 이것은 무엇일까요? 코가 느낄까요? 아닙니다. 우리 몸은 지각하는 자체의 성품이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자기 스스로 깨달을 뿐입니다.
혹시 아직도 못 깨달으신 분은 지금 자신의 코를 한번 세게 비틀어보세요. 그러면 즉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 이놈이구나’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