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선가에서 “덕산봉, 임제할”로 잘 알려진 중국선사들 중 먼저 덕산스님의 깨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덕산스님은 원래 선승이 아니라 금강경을 30년동안 연구해서 금강경소초라는 논문까지 쓴 강사였습니다.
어느 날 중국 남방에서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가르침을 펴는 선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삼아승지겁을 닦아야지, 어떻게 곧바로 마음을 가리켜서 부처가 된다는 말이냐?” 하고 분개하면서 “내가 직접 가서 사이비 종파를 처서 부셔야겠다.”고 떠났습니다.
남방에 있는 용담사 입구에서 떡파는 노파를 만나 점심공양으로 떡을 사먹으려고 했습니다.
덕산 : 점심때가 되어 배가 고프니, 나에게 떡을 좀 파시오.
노파 : 스님은 걸망에 무엇을 걸머지고 있습니까?
덕산 : 내가 30년간 금강경을 공부해서 쓴 금강경소초요.
노파 : 금강경을 30년간 연구하셨으면, 금강경 대가이실 테니, 제가 하나 묻겠 습니다.
금강경에 보면,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스님이 점심(點心)하려고 하는데, 과거 현재 미 래 삼세심 중 어느 마음에 점을 찍으려고 하십니까?
이 질문에 바르게 답을 하면, 점심으로 떡을 드릴 것이고, 답을 하지 못하면 떡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노파의 안목이 놀랍습니다.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점심(點心)이라는 말과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는 금강경의 구절을 연결해서 선문답을 한 것입니다.
당시 깨치지 못했던 덕산스님은 노파의 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해 꽉 막혔고, 떡을 먹지 못했습니다. 덕산이 왜 떡을 얻어먹지 못했을까요? 노파의 말을 따라가서 길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금강경에 대해서는 이론적으로 박사였지만, 살아있는 지혜가 분별심 속에 잠들어 있었습니다.
먼저 이 공안에서 나오는 금강경의 구절, 즉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어째서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일까요?
생각을 나로 여기는 중생의 눈으로 보면, 시간과 공간이 엄연하게 존재합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은 객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내 생각의 산물입니다. 그래서 시공간의 한점을 차지하는 나를 비롯한 세상만물 역시 시공간적인 존재여서 내 생각의 산물입니다. 일체유심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공간을 비롯한 그 안에 존재하는 세상만물은 내가 생각할 때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꿈속의 세상도 역시 우리가 꿈을 꿀 때만 존재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꿈을 깬다면, 어젯밤에 존재했던 시공간의 세상은 몽땅 사라집니다. 그것들은 본래 실제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젯밤의 꿈을 깨듯이 있는 그대로의 실재인 마음의 눈을 뜨게 된다면, 지금 눈앞의 시공간의 세상도 사람도 객관적인 실제가 아닙니다.
따라서 지금 이 자리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과거의 상처, 트라우마, 추억 등을 기억하거나 또는 미래에 대한 근심, 걱정을 통하여 에고의 존재감을 강화해나갑니다. 특히 에고는 과거의 상처나 기억에 매달리고 생생하게 회상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더욱 뚜렷하게 키워갑니다. 에고가 강한 사람일수록 과거와 미래의 속박 속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계속 되새김질을 하며 윤회하는 겁니다.
과거의 기억(상처, 후회, 미련)을 자꾸 소환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면, 이 공부는 진전이 없습니다. 이 공부는 내가 없다는 것인데, 나를 강화시키는 에고야말로 마구니고 귀신입니다.
어쨌든 이 공안에서 덕산은 노파의 질문에 막혀서 답을 하지 못했는데, 도반님들은 이 노파의 질문에 뭐라고 답해서 떡을 얻어먹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