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깨달음이란 게 뭐죠?

by chulwoo5607 2025. 2. 5.

법사 : 거사님, 깨달음이란 게 뭐죠?

거사 : 생각이 일어나는 그 자리에서 저절로 알아지는 것입니다.

 

법사 : 에이, 그거는 깨달음에 대한 설명이고, 진짜 깨달음은 뭐죠?

거사 : ....

 

법사 : 지금 매미 소리가 나죠?

거사 : 예

 

법사 : 저 매미 소리를 들으려고 의식하셨어요?

거사 : 아니요.

 

법사 : 그렇죠? 내가 전혀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들렸죠?

거사 : 예

 

법사 : 바로 그거예요. 내가 알려고 의식함이 없이도 저절로 알아지는 것이  바로 그것이예요. 거사님이 깨달으려고 하는

          그것이죠. 깨달음..

거사 : 아, 예..

 

법사 : 근데 깨달음을 말로 설명하면, 그르치는 거예요. 선(禪)은 설명이 아닙니다. 우리는 “깨달음”이나  “견성”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 말과 동시에 이미지를 그리게 되요. 즉 분별에 떨어집니다.

거사 : ....

 

법사 : “깨달음”이란 말과 “땅~” 이 종소리는 같습니까? 다릅니까?

거사 : 현상으로는 다르게 보이지만, 본질에서는 같습니다.

 

법사 : "땅~" 그냥 이럴 뿐입니다. 그냥 들릴 뿐이고, 그냥 알 뿐이예요. 드러난 모양에 의미를 두지 않으면,  “깨달음”이란             말이나 “땅~” 이 종소리나 똑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깨달음”이라 말해도 깨달음 에 대한 이미지를 그리지

           않습니다. 이것을 직지(直指)라고 하는 것이지요.

거사 : ....

 

법사 : 땅~ 이 종소리를 듣기 위해서 수행해야 됩니까? 용맹정진 하면 더 잘 들립니까?

거사 : 아니요.

 

법사 : "땅~" 이 종소리를 듣는 것은 나의 노력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땅~" 이 종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해 보세요. 내가 안            들으려고 한다고 "땅~" 이 종소리가 안 들려지나요?

거사 : 아니요

 

법사 : 이 들음이라는 것은 내 의지나 생각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듣는 게 아니고,  “텅 빈

           이것”이 듣고 있어서 그래요. 이것을 일상생활 중에서 확인하는 거예요. 아는 줄 모르게 아는  이 일이예요.

          ‘아, 저절로 아는 이놈이 있네!’

 

사물을 볼 때 사물인 줄 아는 놈이 있어요. 소리가 나면, 소리인 줄 아는 놈이 있고, 냄새, 맛을 알고, 감각을 느끼는 놈이

있어요. 또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을 아는 놈이 있어요. 감정이 일어나면 감정 일어난 것을 아는 놈이 있어요.

 

물론 이것을 알았다고 분별심이 안 일어나는 것은 아니예요. 스스로 정견( 正見)을 해야 돼요. ‘아, 이런 경로로 생각이 바로 따라붙는구나.’ 하고 알아차려야 해요.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내용(뜻)이나 기억을 아는 거예요. 그러나 아는 줄 모르게 그냥 아는 이것은 항상 똑같아요.

그래서 그 내용을 아는 것(生覺)과 아는 줄 모르게 아는 것(性品)과는 구별할 줄 알아야 돼요.

 

우리는 실체가 없는 모양에 대한 이름, 이미지, 느낌 등을 기억으로 저장을 해놓았어요. 이런 것은 몽땅 허망한 분별입니다. 이런 것들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달아서 분별이 저절로 쉬어지는 것이지, 억지로 분별을 안하려고 노력해서 쉬어지는 게 아닙니다.

 

분별로 일어난 것은 환(幻)이니까 그래서 그냥 내버려두면, 저절로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여기는 본래 아무런 일이 없어요. "땅~" 종소리가 일어났어도 본래 일어난 적도 없고, 사라졌어도 사라진 적도 없습니다. 본래 환(幻)이었으니까요.

환(幻)은 일어났어도 일어난 바가 없고, 사라졌어도 사라진 바가 없습니다.

 

법사 : "땅~" 이게 뭐죠?

거사 : 종소리입니다.

 

"땅~" 우리는 듣자마자 이것이 종소리다고 분별을 합니다. 그러나 "땅~" 이것은 본래 종소리가 아니예요.

우리가 소통하기 위해서 임시적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습관적으로 종소리다 하고 규정해버립니다.

 

그러니까 "탕~~" 이 종소리가 실제 소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은 ‘이 소리가 내 귀에서 난다’고

또는 ‘이 소리가 실제 있다’고 이 소리를 붙잡아 내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좋다 싫다 집착을 해요.

 

그러나 자성을 자각한 사람은 이 소리가 실제 있다고 여기지도 않고, 좋다고 내 것으로 붙잡지도 않고, 싫다고 내치지도

않습니다. 즉, 시비하지 않고, 머무르지 않아요. 인연과 조건에 따라 소리가 일어났다는 것을 그냥 알 뿐입니다.

 

"땅~" 여기에는 동시에 이것이 드러나 있습니다. "땅~" 소리와 더불어 동시에 이 소리를 아는 줄 모르게 저절로 아는 이것(靈覺性)이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소리만 듣지 아는 줄 모르게 저절로 아는 이것을 볼 줄 모르는 거예요.

 

근본적인 해결은 일상생활 중에서 습관적으로 따라붙는 이 분별이 변하고 헛것이라는 정견( 正見)을 계속 해야 합니다.

그래야 분별경계에 속지 않고, 아는 줄 모르게 저절로 아는 이 자리를 확인하고 머물 수 있어요.

 

몸과 마음인, 오온(五蘊)이 실제로 있어서 허망한 것인가요? 오온이라는 것은 인연과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는 현상에 불과한 것이지 영원히 실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안경이라는 게 실제하는 건가요? 지금 한 생각에서 일어난 거예요. 이런 모양에 이름이 붙여져서 지금 생긴 거예요.

실제 있는 게 아니예요.

 

이건 남한테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예요. 이건 저절로 아는 것이 포인트예요. 법이라는 것은 이름이 법이지, 이것이 법이다 라고 규정할 만한 것이 없어요.

 

“깨달음”이란 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음”이란 말이 깨달음이 아닙니다. 그냥 소리일 뿐이죠. “깨달음”이라는 말도 드러난 모양(생각)입니다. 즉 환(幻)이죠.

 

따라서 “깨달음이 뭔가요?” 라고 물었을 때, 말(의미)에 따라가면, 깨달음이 따로 있는 줄 알고 깨달음에 대해서 설명하겠지만, 말(의미)에 떨어지지 않으면, 대답이 전혀 다르게 나옵니다.

 

“차나 한잔 하시죠.”

“오늘 너무 추운 날씨네요. 감기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