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장자는 제자를 불러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내가 지난 밤 꿈에 나비가 되었다. 날개를 펄럭이며 꽃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녔는데, 너무 기분이 좋아서 내가 나인지도 몰랐다.
그러다 꿈에서 깨어버렸더니, 나는 나비가 아니고 내가 아닌가? 그래서 생각하기를 아까 꿈에서 나비가 되었을 때는 내가 나인지도 몰랐는데, 꿈에서 깨어보니 분명 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진정한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내가 된 것인가?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내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과연 어떤 것이 진짜일까요? 나비일까요? 장자일까요?
꿈속의 나비는 날개를 펄럭이며 꽃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녔는데, 너무 기분이 좋아서 자기가 장자인지도 몰랐어요.
그리고 아침에 잠에서 깨보니 꿈속의 나비는 사라지고, 다시 현실의 장자로 돌아왔어.
그런데 어떻게 꿈속 나비의 기분 좋았던 기억을 현실의 장자가 가지고 있을까요?
만약에 꿈속의 나비가 진짜라면, 나비가 가지고 있던 기분이나 기억은 나비의 것이니까 나비가 사라졌으면 같이 사라져야 하잖아요.
그러나 꿈속의 나비는 사라졌지만, 꿈속 나비의 기분이나 기억은 그대로 남아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어젯밤 실제로 나비 꿈을 꾼 자는 나비가 아니었다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실제로 나비 꿈을 꾼 자는 누구였을까요?
현실의 장자였을까요?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일까요?
그런데 현실의 장자 또한 꿈을 꾸는 주체가 될 수 있을까요?
왜냐면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장자라고 할꺼죠? 장자의 몸이라는 것도 장자의 마음이라는 것도 한순간도 멈춰 있지 않고, 변해가 버리는데...??
따라서 현실의 장자 또한 어젯밤 꿈속의 나비와 같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젯밤 나비의 꿈을 꾸고, 아침에는 장자라는 현실의 꿈을 꾸는 자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그런데 어젯밤에 나비 꿈을 꾸던 자와 현실에서는 장자의 꿈을 꾸는 자는 동일한 자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어젯밤의 나비의 기분이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게다가 그 놈이 현실에서는 “나비가 꿈에서 장자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장자가 나비 꿈을 꾼 것인가?” 하는 의문도 펼쳐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동일한 한놈이 어젯밤 꿈속에서 나비를 지켜보고 있었고, 현실에서는 장자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젯밤에는 나비의 꿈을 꾸고, 현실에서는 장자의 꿈을 꾸고 있는 이것은 무엇일까요?
꿈속 세상이나 현실 세상이나 모두 시공간이 펼쳐지는 3차원의 세상이지만, 꿈을 꾸는 자는 시공간에 갇혀 있는 3차원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도 없고 생각으로 찾을 수도 없고, 오직 마음의 눈(心眼)을 떠야만 볼 수 있고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한마음이라고 하고, 불성, 본성, 본래면목 등등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이고 있지만, 이것은 본래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습니다.
이것은 찾으면 없는데, 찾지 않으면 없는 것으로서 신묘하게 있습니다.
이것이 일체를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 하나가 어젯밤 꿈을 펼쳐냈고, 아침에는 현실의 꿈을 다 펼쳐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이것의 존재함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내가 다 안다고, 그래서 내가 다 한다고 나를 막 내세웁니다.
이것이 깨친 사람과 일반 중생들과의 안목의 차이입니다.
일반 중생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만 마음이 가 있고, 깨친 사람은 오직 이것에만 마음이 가 있습니다.
어젯밤 꿈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꿈속에서도 사물을 보는데, 육안으로 보는 게 아닙니다. 침대 위에서 눈을 감고 자는데, 어떻게 육안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꿈속에서도 음악을 듣거나 다른 사람의 말소리를 듣는데, 귀로 듣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밖에서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닌데, 꿈꾸는 사람한테는 들리거든요.
그러니까 꿈속에서 우리가 보고 듣는데, 꿈속의 등장인물이 실제로 살아서 보고 듣는 게 아니고, 침대 위에 자는 사람이 보거나 듣는 것도 아닙니다.
꿈속에 나오는 나라는 사람은 꿈속의 캐릭터일 뿐이고, 실제로 보고 듣고 느끼고 그 꿈을 아는 놈은 꿈을 꾸는 자입니다.
이와 같이 꿈속에서 꿈이 꾸어지는 원리가 현실의 삶에도 그대로 똑 같습니다.
현실은 낮에 꾸는 꿈이거든요. 밤꿈이나 낮꿈이나 꿈인 것은 똑같아요.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특정한 육체와 개성을 가진 나는 이 현실세계라는 무대에 등장하는 캐릭터일 뿐이고, 이 육체가 살아서 스스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이 몸을 가진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독립된 주체인 줄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꿈속의 등장인물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줄 아는 것과 똑같습니다.
게다가 너무 오랫동안 그런 관념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아주 굳게 확신을 가지고 있어서 여간한 약으로는 치유하기 어렵습니다.
옛날에는 종교계에서 인연있는 아주 극소수의 특별한 사람들만이 깨어났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현대문명의 발달로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크게 상승함에 따라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깨어나고 있습니다.
꿈을 꾸고 있는 놈이 자기가 꿈속의 캐릭터인 줄 착각하고 있다가 시절 인연에 따라 ‘아, 나는 이 꿈속의 캐릭터가 아니라, 이 꿈을 꾸는 자구나!’ 하고 스스로 문득 자각하고 꿈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꿈을 꾸는 자는 꿈을 떠나서 따로 있지 않습니다. 꿈꾸는 자와 꿈을 두부 자르듯이 나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꿈이 꾸어지고 있는 지금 여기를 떠나서 따로 찾으면 안됩니다.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이 깨달음(覺)에 목말라 하는데, 그러나 실제로 알고 보면 우리는 깨달음을 잡을 수도 없지만, 깨달음에서 한순간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의 일상생활이 깨달음(覺) 아닌 게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듣는다는 것이 바로 깨달아 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자기 집안에 이미 가지고 쓰고 있는 보물(覺)은 돌아보질 않고, 남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보물에만 탐을 내는 것을 옛적부터 큰 어른들은 꾸짖었던 것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 대주스님이라는 분이 당시 큰스님으로 소문이 났던 마조선사를 찾아왔을 때, 마조선사는 “왜 자기집안의 보물창고는 돌아보질 않고, 쓸데없이 밖으로 돌아다니며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대주스님은 “어떤 것이 저의 보배창고입니까?”하고 물었고, 이에 마조선사는 “지금 나에게 묻고 있는 그것이 그대의 보배창고다. 모든 것이 갖추어져 조금도 모자람이 없고 사용이 자재한데, 어찌 밖에서 구하려 하는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말 한마디 끝에 대주 스님이 크게 깨달았다고 하는데,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이것을 깨닫게 되면, 앞서 이야기했던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에 나오는 나비나 장자도, 게다가 이 글을 쓰는 놈도 또 이 글을 읽는 사람도 둘이 아니라는 이치에 눈이 떠지지 않을까요?
창밖에는 밤사이에 하얀 눈이 내려서 수북히 쌓여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