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 영화를 보면, 모피어스가 주인공 네오에게 내미는 두 가지 약이 있다.
하나는 파란 약이고, 다른 하나는 빨간 약이다.
파란 약은 이전의 현실세계로 되돌아가는 약이고, 빨간 약은 이 세계의 진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약이다.
주인공 네오는 영화에서 빨간 약을 선택하고, 가상현실에서 자아를 지배하는 방법을 깨닫고 초인이 되어 인류를 구원한다.
매트릭스 영화가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은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오락영화를 넘어서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이 우리가 실제라고 믿는 가상현실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현대인들에게 전달했다는 점이다.
마음공부에서도 파란 약과 빨간 약이 있다. 소위 깨달았다고 하는 성인들은 우리에게 마음공부에서 목표로 하는 깨어남을 위해서는 빨간 약을 선택해야 한다고 권유한다.
그렇다면 과연 마음공부에서 파란 약과 빨간 약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파란 약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그대로를 진실이라고 믿고 살게 하는 약이다.
중생들은 깨달은 사람의 눈에는 누구나 이 파란 약에 중독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반면에 빨간 약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것들이 전부 환영임을 보게 해주는 약이다.
즉, 우리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모든 만물들이 실상은 우리들의 생각으로 만든 것이며, 그 생각, 관념에 우리가 부여한 믿음이란 사실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위 깨달았다고 하는 성인들은 왜 우리에게 빨간 약을 먹으라고 권하는가?
도대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왜 꿈이고 환상이라고 하는가?
우리는 하루에도 오만가지 생각, 감정, 감각들이 매 순간 인연과 조건에 따라 파도처럼 생멸하고 있다.
게다가 이렇게 일어나는 이것들에다가 자꾸 개념을 덧붙여가지고 이야기를 만든다.
잘 했다느니 잘못 했다느니, 사랑한다느니 미워한다느니, 어우 감동이야 아니 어떻게 저렇게 몰상식할 수가 있나.. 등등 이런 해석을 막 붙여서 자기가 주관적으로 만든 세계를 살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똑같은 객관적인 세상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자가 생각으로 만들어 놓은 꿈속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어젯밤에 온갖 꿈속에 있다가 아침에 눈을 뜨면, 꿈속 세상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생각으로 만든 세상도 꿈과 같이 실제하는 게 아니다.
그러면 지금 이순간 실제하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 이 순간 환영과 같은 것들이 찰라찰라 생멸하고 있다는 사실밖에 없다.
온갖 빛깔로 소리로 향기로 맛으로 촉감으로 생각으로 감정으로 인연과 조건에 따라 춤추듯이 펼쳐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꿈을 깬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냥 사실을 사실대로 팩트만 보는 것이다. 그냥 이야기를 만들지를 않는다. 그냥 그럴 뿐이다.
그냥 그런 일이 인연따라 일어났을 뿐. 뿐. 뿐..
그냥 화가 일어났을 뿐, 그냥 슬픔이 일어났을 뿐, 그냥 누가 나에게 칭찬을 했을 뿐, 그냥 누가 나에게 욕을 했을 뿐....
매사를 이와 같이 “그럴 뿐이다” 라고 보고, 후속 이야기를 만드는 짓을 하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 생각을 아주 단순하게 해주고, 마음이 저절로 쉬어지고, 고요해진다.
그러나 “그럴 뿐이다.”라는 것도 아직은 생각의 차원이다. 이 “그럴 뿐이다”라는 생각마저 벗어나는 것이 선(禪)의 세계이다.
그래서 이 “선(禪)”의 세계란 “그럴 뿐”이라는 생각마저 뚝 끊어져서 그냥 일체가 알 수 없는 생명의식의 살아 움직임이라는 것을 보게 한다.
이것은 곧장 보고 아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즉각 보고 아는 것이다.
(손을 들어보이며)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
법사들이 손가락을 들어보이고, 선사들이 주장자를 들어보인다.
이게 “선(禪)”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곧장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손을 들어보이며) 여기에 무슨 생각이 있습니까? 이걸 생각으로 봅니까? 이걸 보는데, 무슨 생각이 필요해요? 내가 본다고 생각해야 보입니까?
(손을 들어보이며) 이것이 생각이 뚝 끊어진 생각이전의 세계고, 언어도단(言語道斷)이며, 주객미분전(主客未分前)의 세계입니다.
근데 (손을 들어보이며) 이걸 보는 순간, 우리 생각은 이걸 분별하고 해석하려고 하는 겁니다.
‘손가락을 든 의미가 뭐지?’ ‘왜 이게 선(禪)의 세계일까?’ 생각으로 이해하려고 하고 알려고 덤비니까 점점 어려워지는 거죠.
생각이 끊어진 생각이전의 세계를 어떻게 생각으로 알 수가 있냐고요?
우리가 아는 것은 오직 생각으로 만든 세계일 뿐입니다.
나와 이 세상이라는 것도 신묘하게 내 마음 속에 비춰진 거울속의 그림자와 같은 겁니다.
마음공부에서 해탈(解脫)한다는 것은 원래 내가 유아(有我)였는데, 수행해서 무아(無我)가 되는 게 아닙니다. 원래부터 무아(無我)였어요.
내가 아는 나라는 것은 언제 태어났고, 어떻게 살아왔다는 기억과 정보의 덩어리에 불과한 것이었는데, 그동안 그것을 유아(有我)라고 착각한 것이었고, 그 착각에서 깨어난 것뿐입니다.
그래서 전통 조사선(祖師禪)은 수행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오직 견성(見性) 즉 깨달음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깨닫기 위해서 생각으로 유위(有爲) 조작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러면, (있는 그대로) 선(禪)의 세계에 있게 됩니다.
그래서 선사들은 내가 공부하지 않는 무위(無爲)공부를 하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 공부가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다만 생각의 내용물에 빠지지 않으면, 생각 자체는 공(空)한 것입니다.
생각 자체가 무슨 힘이 있어서 나를 구속하는 게 아닙니다. 거꾸로 내가 생각에 사로잡혀서 생각에 힘을 주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생각에 힘을 주지 않으면, 생각은 있거나 없거나 아무런 상관이 없고, 나는 그런 생각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루 종일 생각해도 생각한 바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생명의식인 내가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들이 인연따라 춤을 추고 있는 것이고, 내가 감상할 수가 있는 겁니다.
이와 같이 생각이란 것은 실체없는 허깨비이니까 필요하면 붙잡아 쓰고, 필요 없으면 버리면 되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깨달음이니 견성이라는 것이 무슨 신비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누구나 다 지금 깨달아 있고, 견성하고 있습니다.
다만 중생들은 자기를 중생의 모습으로만 보니까 자기가 못깨달았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가 선사나 법사들의 법문을 듣다가 시절 인연이 되면, 문득 안목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만 깨달아 있는 게 아니라 누구나 본래부터 깨달아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심지어 지금까지 하찮게 여겼던 곤충 미물에서 이 우주 전체가 깨달아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지금까지 자기 생각에 속았다는 걸 알고 쓴 웃음을 짓게 되는 것이죠.
자, 이제 여러분은 파란 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빨간 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이것은 파란 약은 그르고 빨간 약은 옳다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냥 선택의 문제일 뿐입니다.